멀리 천리가 넘는 춘천, 왕복 12시간의 운전으로 힘들었지만 처음담아보는 소양교와 그 앞에 서있는 소양강처녀상....
흥분되고 가슴 설레는 감동의 순간이 지금도 느껴진다...!!
열여덟 딸기 같던 그 처녀도 어느덧 중년의 여인이 됐다. 반야월 선생이 작사한 <소양강 처녀>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윤기순(57) 씨를 만나기 위해 춘천을 찾았다. 스무 살 이후 전국을 떠돌던 윤씨가 고향에 정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윤씨는 춘천시 사북면 지암리 집다리골 계곡 근처에서 민박집과 식당을 경영하고 있다.
“별 대단한 화제도 아닌데…. <소양강 처녀>의 모델이라고 해서 모델료를 주는 것도 아니잖아요?”(웃음)
윤씨가 자신이 노래 속의 그 ‘처녀’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97년이었다. <전국노래자랑>에 반야월 선생이 등장하자 반가움에 유심히 TV를 보던 중이었다. 반 선생이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시상을 심어준 주인공이라고 밝히는 것 아닌가!
“‘저 양반 참 기억력도 좋으시네’ 하고 생각했어요. 같은 사무실에 있기는 했지만 겨우 몇 개월 남짓이었거든요. 제 이름을 기억하실 줄은 상상도 못 했죠.”
반야월 선생과 춘천에서 보낸 추억은 3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윤씨는 만으로 18세, 꽃다운 나이였다. 한국전쟁에서 오른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와 고된 일에 지쳐 병치레가 잦은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윤씨는 여섯 명이나 되는 동생들까지 책임져야 하는 형편이었다. 당시 여성들 사이에서 유망한 직업이었던 전화교환원이 되기 위해 이불 한 채 짊어지고 무작정 상경했다.
“우연히 신문을 보다 음반을 취입해 준다는 광고를 봤어요. 스타가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밤무대 월수입 보장’이라는 문구에 확 끌렸죠.”
돈 한 푼이 아쉬운 가난한 처녀였던 윤씨는 그렇게 김종한작곡사무실을 찾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노래도 취입했다. 당장 밤무대에 올라가 고향에 생활비를 부치고 싶었지만 “다른 사무실에서 노래 연습을 더 받는 편이 좋겠다”는 선생님 말씀을 따라 ‘가요작가동지회’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가요작가동지회에는 반야월 선생과 작곡가 고 박시춘 선생 등 명망 있는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때부터 윤씨는 몇 달간 사무실의 잡일을 거들며 노래를 배웠다.
“큰딸이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 죄송스러웠던 아버지가 사무실 선생님들을 고향으로 초대했어요. 반 선생님을 비롯한 몇 분이 오셔서 함께 소양강 줄기 너머 고산이라고 불리는 섬으로 배를 타고 들어갔죠. 들판에는 갈대가 무성하고 강가에는 자갈밭까지 쫙 펼쳐진 경치 좋은 곳이었어요.”
어죽을 끓여먹고 낚시를 하는 동안 술이 몇 잔 돌았다. 배를 타고 다시 돌아올 때쯤에는 물안개가 가득 피어올라 운치를 더했다고. 이때 반 선생은 소양강의 그림 같은 풍경과 함께 윤씨의 순수하고 천진한 모습에 감명받아 시상을 떠올리게 됐다고 한다.
일본 건너가 야간업소에서 민요 부르기도
“당시 제 별명이 ‘소양강 처녀’였어요. 시골에서 올라와 씩씩하게 돌아다니는 저를 보고 선생님들께서 항상 그렇게 불러주셨죠.”
작곡가 이호 선생이 가사에 곡을 붙여 완성된 <소양강 처녀>는 김태희라는 신인 여가수에게 돌아갔는데, 그녀는 이 노래로 10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노래의 주인공인 윤씨 역시 그해 가을 사무실을 나와 본격적으로 가수생활을 시작했다. 군민잔치와 군 위문공연으로 출발했다.
“그때만 해도 공연이 자주 있는 것이 아니어서 저 같은 무명가수가 무대에 올라도 한 시간을 걸어서 보러 오고는 했어요. 반응도 뜨거웠죠.”
위문공연을 하며 전방을 쭉 돌면 숙식이 저절로 해결돼 좋았다. 비슷한 이유로 밤무대 지방공연을 시작했다. 몇 개월씩 지방 도시의 야간업소와 계약하면 또 거기서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으니까. 서울에서 밤늦게 공연이 끝나는 날 운 나쁘게 버스가 끊기면 윤씨는 무작정 걸었다. 통행금지 단속을 피하기 위해 길도 모르는 이문동 골목길을 밤새도록 헤매다 보면 훤하게 해가 밝아오고는 했다고.
<소양강 처녀>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여리고 수줍은 딸기 같은 처녀인 반면 윤씨는 들꽃처럼 강하고 끈질겼다. 매일 이어지는 공연에 힘들고 지쳐도 주저앉아 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고향에는 곧잘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기를 밥 먹듯 하던 부모님과 학업을 채 마치지 못한 동생들이 줄줄이 있었다. 돈이 절실했다. 건강한 몸 하나만 믿고 그저 소처럼 묵묵히 일했다.
“팔자가 그런 것인지…. 셋째와 넷째 여동생도 노래를 하겠다고 고집을 피우더군요. 결국 데리고 다니면서 세 자매가 공연을 했죠.”
윤씨 자매는 노래는 물론 춤과 의상까지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패키지 공연을 펼친 덕분에 수입이 괜찮았다. 낙농업을 시작한 고향의 부모님께 젖소 20마리를 사드리기도 했다. 그러나 하필 그때 우유파동이 터졌다. 300만 원을 넘게 주고 산 젖소가 반의 반 값도 못 받은 채 팔려나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윤씨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아버지가 암으로 타계하자 병 수발을 위해 고향에서 머무르던 윤씨는 일본으로 건너가 야간업소에서 민요를 불렀다.
윤씨가 춘천에 다시 정착한 것은 2006년 4월의 일이다. 혼자가 된 어머니 생각에 떠돌아다니던 일을 다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것. 지금은 전부터 부모님이 하던 민박집과 식당을 도맡아 운영하고 있다.
“이것도 여름에 두 달 남짓 잠깐 하는 장사여서 많이 남지는 않네요. 요즘에는 용돈벌이로 지역 축제나 각종 행사에 나가고는 해요. <소양강 처녀>요? 무대에서 자주 부르죠. 다들 노래 속의 실제 주인공으로 저를 소개하거든요.”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은 아니었지만 윤씨의 얼굴에서는 강인함과 당당함이 엿보였다. 힘들기는 했지만 열심히 일해 부모님 아쉬운 것 없이 해드렸고, 동생 여섯 명 모두 학업을 마치고 결혼을 했다. 윤씨의 집 벽에는 동생과 조카들의 행복해 보이는 가족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왜 아직 미혼이냐”고 묻자 “결혼은 물론 연애조차 생각할 겨를도 없었어요. 먹고 살기에 바빠서”라는 담담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 윤씨에게서는 뱐야월 선생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청초한 소녀의 이미지 대신 가족을 위해 씩씩하게 살아온 우리네 맏언니 혹은 큰누나 같은 푸근함이 느껴졌다. 박미소 기자
당시 반 선생은 ‘가요작가동지회’ 부회장으로 있었다. 이곳에서 사무를 봐주며 노래를 배우던 열여덟 살 처녀가 자신의 고향인 춘천으로 동지회 식구들을 초대해 소양강가에 있는 처녀의 고향집을 방문하게 된 것. 강의 아름다운 풍경과 처녀의 순수한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반 선생이 즉흥적으로 시를 메모해 두었고, 여기에 곡을 붙여 <소양강 처녀>가 탄생했다. 그때 반 선생에게 시상을 안겨준 처녀가 바로 윤기순 씨다. 윤씨는 동지회를 떠난 이후 야간업소에서 가수로 일하며 살아왔다. 서울과 전국 각지를 떠돌다 2006년 다시 고향 춘천에 정착해 민박집과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